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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5 군산 / 당일치기 기차 여행
    기록물/국내여행 2023. 5. 24. 12:15

    즉흥적으로 일요일 군산행 열차 티켓을 끊었다. 일기를 작성하고 있던 시각은 오전 6시 25분. 이 열차를 타겠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부랴부랴 준비를 마쳤다. 다행히 당일치기 여행인데다 계획이 전혀 없었기에 짐도 없었다. 가벼운 가방을 덜렁 들고 집을 나섰다.

    ktx도, srt도 직행하지 않는 군산은 가능한 아침에 도착하려면 용산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야했다. 어딘가 냄새도 나는 듯 오래되어 갈라진 코팅의 무궁화호는 계속 찌익 찌익 플라스틱이 마찰하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달린다.

    이 소리를 들으며 엄청나게 천천히 가고 있는데 이 열차, 영등포에서 ktx를 먼저 보내기 위해 정차한단다. 역시 값 싼 열차라 이런데까지 밀리는 건가. 고속열차와의 차별화를 위해 이런건 당연히 양보해야 하겠다. 무궁화호를 먼저 보내는 ktx라니 말이 안된다. 이런 당연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나를 포함한 요즘 사람들이 화가 많아지고, 자본에 절어 천박해진 이유가 이런 불편함을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돈을 조금 더 내면 더 빠르고, 쾌적하고, 고급스러운 ktx를 타고 무궁화호를 앞질러 갈 수 있으니까. 인내하지 않아도 되니까. 무궁화호에는 어르신들만이 드문드문 자리를 채웠다.

     

    근대 박물관, 미술관, 건축관

    용산에서 3시간 반 쯤 달려서 도착한 군산시.

    군산역에서 약 10분 정도 택시를 타고 내린 군산 시내는 되게 조용하고 한적하고 사람이 있는 듯 없는 듯 아기자기했다. 나는 건축관엘 들렀다가, 미술관엘 들렀다가, 역사박물관을 차례로 들르면서 지리적 특성으로 일제의 피해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군산의 근대 스토리를 빠르게 구경했다.

    나는 본 적 없지만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촬영된 장소가 이 곳이랬다. 그래서인지 80~90년대의 기억을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 동네 전체가 해당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컨셉과 실제가 혼재되어있는 도시. 메인 도로는 요즘 유행하는 느낌의 카페와 흑백 사진관, 그리고 소품샵들이 즐비해 있지만 한 블럭만 벗어나면 정말 옛 가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정말 조용하다, 이 도시. 

     

    과자 좋아, 빵 좋아

    그 지역의 유명한 빵집은 그 아무리 무계획 여행자일지라도 꼭 찾아보는 장소. 군산과자조합과 이성당엘 들르기로 했다.

    이렇게 스콘과 에그타르트, 휘낭시에 등 구움과자류를 팔고 있는 군산과자조합. 안의 분위기가 정말 예쁘던데 빨리 이성당엘 들러서 점심거리를 사서 대장봉엘 오르기로 했으므로 시간이 없었다. 시간만 좀 더 넉넉했다면 저 곳에 앉아서 티타임을 즐기고 싶었는데 넘 아쉬움.

    그리고 서둘러 자리를 옮겨 찾아온 일요일 오전 11시의 이성당. 빵집에 줄이 길게 늘어서있길래 입장줄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줄을 섰다. 그렇게 한 20분 지났을까... 내 옆으로 한 커플이 기다림 없이 그냥 빵집엘 들어가는거다. 놀라서 줄의 시작을 거슬러보니 이거... 야채빵이랑 단팥빵 대기줄이래.

    난 그냥 점심거리로 샌드위치 하나 사고 싶었을 뿐인데 20분을 버리다니 진짜 순간 화났음. 나 팥 안먹는다고요. ㅠㅠ 그러나 정보 하나 알아보지 않고 간 내가 잘못이지 누굴 탓하겠어. 그냥 기다린김에 10분 더 기다려서 단팥빵과 야채빵을 사서 나왔다. 

    맛있어보이니까 뭐... 봐준다.

     

    대장도 대장봉

    운전면허를 딴 건 거의 8년 쯤 넘어가는데 운전을 안한지도 한 8년쯤 되어간다. 수도권 거주자의 숙명이랄까... 사실 그냥 겁이 많고, 굳이 필요성을 못느껴서 안했던건데 나이 서른도 한참 먹어놓고 운전 하나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최근 운전 연수를 받았다. 그리고 근 한달을 계속 운동을 하러 갈 때 남편을 옆에 태우고 운전을 해왔다가...

    처음으로 혼자 운전을 하기로 했다. 그것도 왕복 80km를. 친구들은 용기가 가상하다고, 혀를 내둘렀지만 이런 계기가 없으면 계속 혼자 운전을 못할 것 같았다. 새만금방조제를 달리며 보는 경치가 그렇게 예쁘다고 해서... 그리고 대장도 대장봉에서 내려다보는 섬의 전경이 예쁘다고 해서, 군산을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덜컥 결정한 계획이었다.

    간다간다 최지희! 응원 잔뜩 받고, 좋아하는 노래도 틀어놓고, 쏘카를 운전해서 도로를 나왔는데... 처음엔 진짜 손이 달달 떨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익숙해지더라. 옆에 남편을 태우고 운전할 때엔 "이거 이렇게 해도 돼? 괜찮아? 지금 들어간다? 말리지마?" 염병을 떨면서 들어갔는데 혼자니까 그냥 느낌대로 밟고 내 맘대로 들어감. 근데 이게 운전할 때 필요한 마인드였던건지... 괜찮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랬다.

    평소에 suv만 몰다가, 경차를 처음 몰아봐서 그런걸지도 몰랐다. 너무 장난감 같았고 엑셀을 밟아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가 않아서 걍 멋대로 밟고만 다녔다. 분명 속도는 80을 넘게 가리키고 있는데, 내가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안와서 유턴도, 교차로 좌회전도 시속 70Km에서 돌았다...가... 울렁거려 죽는 줄 알았음. 보조석에 둔 가방은 다 엎어지고 내 몸은 계속 쏠리고... 이게 맞나?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전 혼자인걸요. 그냥 달렸다. 그 말인 즉슨.. 그냥 좆같이 운전했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이 이후로 남편을 옆에 태우고 서울 도로를 달렸는데, 갑자기 왜이렇게 운전 스타일이 바뀌었냐고 놀라워...했다.

    암튼 식은땀 줄줄 흘리면서 50분 가량을 달려 도착한 대장도. 긴 치마 원피스를 입고, 대충 단화를 신고 오르는데... 은근히 빡셌다. 그래도 오르는데 15분 정도 걸리는 작은 동산.

    조금씩 오를때마다 바다가 보인다. 더워서 땀을 흘리다가도 눈 앞에 보이는 바다에 힘든줄 모르고 쭉쭉 오름. 크로스핏을 시작한지 1년 쯤 되어가나, 솔직히 등산같은 오래 체력을 붓는 일에 알 수 없는 근자감이 생긴 게 맞는데 (ㅋㅋㅋ) 최근에 종아리 염증과 무릎 시림을 핑계로 한 2주 간을 쉬어서 그런지 작은 산에도 되게 힘이 들어서 괜스레 우울해졌다. 서울 돌아가면 다시 크로스핏 열심히 다녀야지, 굳게 다짐함.

    그리고 대장봉에 도착! 정말로, 군산 근처의 장자도와 선유도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너무 예쁘더라. 바다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보트를 타는 등 물을 즐기고 있고, 산 위에서는 관광객들이 깔깔거리면서 경치를 즐겼다. 내가 별 말을 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혼자 만끽하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너무 좋았다. 

    이성당에서 사온 샌드위치를 이 날의 첫 식사로 때려넣고 빠르게 하산함. 왜냐하면 나 쏘카 4시간 밖에 빌리지 않았거든. 가는데 오는데 총 두 시간 걸리니까 빠릿빠릿 움직여야한다구.

     

    늦은 시내 구경과 한일옥

    무사히 시내로의 귀환을 마치고, 오전에 하지 못한 동네 구경을 마저 할 차례다. 소품샵엘 들러 제로웨이스트 용품을 사거나 (모순의 연속이다. 제로웨이스트를 위한 소비라니.) 책방엘 들러 책을 훔쳐 봤다.

    그리고 출발 전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들른 한일옥. 소고기무국 달인 집이라는데 정말 너무 맛있었음. 무의 식감이 싫어서 소고기무국 평소에 잘 안먹는데 정말 싹싹 비웠다. 콩나물 무침부터 깍두기, 그리고 김치까지 너무 맛있었다. 진짜 전라도 여행 너무 좋다. 나오는 모든 음식들이 다 맛있다.

    그래도 혼자 운전한 첫 여행이니까, 군산을 기념하고 싶어 산 두 개의 기념품. 초원 사진관 뱃지와 군산의 특산품이라는 박대 자석이다. 자석은 냉장고에 잘 붙여놨고, 뱃지는 파우치에 잘 달아놓음. 

    내려올 땐 무궁화를 탔지만 올라갈 땐 새마을호로 세 시간 10분 가량을 달려 군산 당일치기 여행 종료!

    돌이켜 보건대 군산은 되게... 특이한 도시였다.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시작하는 결이 항일과 근대의 아픔, 그리고 우리 민족의 한 같은걸 굉장히 넓게 소리치고 있는데... 갑자기 길 하나를 벗어나면 유카타를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라멘가게가 나오거나 일어를 우리말로 쓴 오마카세 초밥집이 나오거나 하는 식이다. 이러나저러나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걸 보여주는건가? 싶기도 하지만ㅋㅋㅋ 이 무슨 혼종의 동네인가 싶어서 웃겼다.

    그래도 혼자 당일치기로, 빠르고 알차게 즐길 수 있는 도시임에는 틀림없다! 나중에 군산을 돌이켜보면 대장봉에서 내려다 본 섬과 바다, 그리고 아기자기하고 깨끗하지만 쓸쓸한 거리가 오래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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