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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집 근처에 비둘기 한마리가 얼씬거리기 시작했다. 그 땐 마침 비가 오고 있었고, 그래 얘도 비를 피하려는거구나. 싶어 넘겼다.
그런데 퇴근 후. 분명 비가 오고 있지 않는데도 비둘기가 화분에 앉아있는 거다. 너무 코앞에, 또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생명체에 순간 화들짝 놀라면서도 쫓아야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왁! 하고 소리를 질러봤는데 이상하게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잠시간 비둘기를 쫓아내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그러나 한참을 분무기로 물을 쏘아보기도, 창문을 퉁퉁 두들겨보기도, 비둘기의 천적이라는 황조롱이의 울음소리를 오래 틀어보기도 했으나 반응한 것은 아랫집 강아지요, 비둘기는 잠시 움찔할 뿐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스멀스멀 쎄한 기분이 들 정도로 몸집을 잔뜩 부풀리는 행위만 반복하길래, 두려움을 조금 담고 카톡을 통해 친구에게 "얘 이러다가 여기서 알이라도 낳는거 아니냐"며 낄낄거리던 순간.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잔뜩 부풀린 몸 아래 깔려있는 하얀 물체를.처음엔 너무 웃기고 신기했다. 마침 친구와 알이라도 낳는거 아니냐며 농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친구와 ㅋㅋㅋ을 한참 주고받고, 일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실시간 중계와 사진을 다량 전송하고 난 후. 갑자기 이 친구가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알을 지키기 위해 내가 쏘아댄 물줄기와, 위협을 모두 견뎌낸 것이 아닌가. 그러고나니 이 생명체에 갑자기 복합적인 감정이 생겨버리더니... 마침내 정이 들어버렸다.
그날 밤 나는 내내 비둘기가 계속 그 자리에 앉아있는지 지켜보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일이 이 친구가 잘 있는지 지켜보는 일이 되어버릴 정도로, 복잡한 심경을 가지기에 이르렀다.출근 날 아침의 비둘기. 아이컨택을 하고 출근길에 올랐다. 이 친구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인터넷의 온갖 글들을 검색하고, 친구들과 남편에게 경험을 묻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찾아본 바로는 비둘기는 유해동물인데다 균과 벌레가 매우 많고, 또 머리가 좋아 본인의 집을 인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에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 서둘러 정리(?)하지 않으면 이 친구 뿐 아니라 다른 비둘기까지 앞으로 이곳을 계속 찾아오게 될 거라는 게 다수의 의견이었다...
앞으로 꼬이게 될 벌레와, 똥 무더기들, 그리고 아침마다 듣게 될 이 친구(들)의 울음소리가 어찌나 힘들지.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 집은 물론이거니와 아랫집에게 해가 될 것이 너무도 명확하기에 남편이 오면 이 친구와 작별을 고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알을 어떻게 해야하는가-알은 살려둘 것인가, 아니면 위치를 옮길 것인가, 깨버릴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비둘기는 엄연히 유해동물이며 도심에 남겨 둔 비둘기집 역시, 알을 낳도록 하여 개체수를 관리하기 위한 용도라는 글과 남편의 강력한 의견을 듣고... 깨기로 결정했다.속이 울렁울렁했던, 알을 치우던 순간.
다행이라고 해야할 지 남편이 새와 새 둥지 치우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다. 남편은 퇴근길에 가방 한 가득 무언가를 잔뜩 들고 왔다. 그리고 비둘기와 잠시 대치하다가 성공적으로 쫓아냈다. 비둘기는 본인의 집과 알이 치워지는 장면을 건너에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정말 좋지 않았다.사실 저 곳은 내가 화분을 키우던 장소였다. 그러나 그 장소를 비롯하여, 바질과 로즈마리 등 허브가 자라고 있는 화분이 새가 알을 낳기에 최적인 조건이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난 후 아쉬움을 가득 안고 치워야만 했다. (아빠는 그 사진을 보자마자 새가 둥지를 틀도록 몰랐어!? 라고 내 무신경함을 놀라워했으나, 심지어 이 친구는 내 화분을 보고 둥지도 틀지 않았다.) 화분을 올려두던 원목 받침대와 넙적한 화분들을 모조리 치워냈다. 물론... 그 사이에 새가 진드기를 옮겼을 수도 있으니, 키우던 식용 식물과 안녕을 고해야했음은 물론이다.
최근에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타 생명군에 해를 끼치는 유일한 집단이라는 누군가의 글을 읽고 공감했던 적이 있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어우러져 살아가며 본인의 생존을 위해 타 동물을 잡아먹을 뿐, 인간처럼 보기에 유쾌하지 않다거나 의미 없이, 혹은 내게 불편함을 준다는 이유로 해치지는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비둘기의 알을 치우며, 내가 한 행동이 과연 나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타 생명체에게 의미없는 해를 끼친 것은 아니었을까 씁쓸했다. 그리고 비둘기가 나 뿐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던 해로움들을 다시금 곱씹으면서, 나의 해로움을 정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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